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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in DE/어느 하루, feat. H 양

겨울나는 부추, 해외에서 한국 채소 먹기!

부추가 겨울을 나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저는 사실 몰랐어요. 

서울에서 나고 반칠십 이상을 살았고 

한국에서는 슈퍼나 시장 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부추가 겨울을 나는지, 

꽃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요.

해외 살다 보니 흔하고 당연한 것들이 어려운 일이 되니 모든 게 소중해지더라고요. 



처음 독일에 온 날짜가 9월 3일. 

한국이라면 아직은 좀 늦더위가 한창일 때였죠. 

그래서 옷도 긴 팔은 거의 없었고 반팔에 얇은 카디건 몇 벌이 다였는데, 

독일은 9월이면 이미 한국의 10월 말이나 11월 초처럼 추운 날씨였어요. 

그렇게 첫 해, 첫가을을 독일에서 혹독하게 신고식을 치렀었죠. 

처음 제가 독일에 왔던 그 해 독일의 겨울은 사상 최악의 겨울이 됩니다. 

9,10,11월을 제외하고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단 3개월만 놓고서 이야기를 해도

그 해 겨울엔 볕이 든 날이 두 손으로 그 횟수를 꼽고 손가락이 남아돌았었죠. 

뉴스에서도 40년 만에 볕이 드문 독일의 겨울 날씨였다고 다룰 정도였어요.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었고 독일에서 처음 맞는 봄이 었어요. 


봄이 조금씩 볕이 드니 기분도 좋아졌는데, 한국 음식들에 대한 그리움도 커졌더라고요. 

그런데, 그해는 가지고 있던 씨앗이 하나도 없어서

또 나름 괴로운 봄과 여름일 지냈어요. ㅎㅎ

그리고 1년 만에 한국에 들어가게 된 그 여름, 

온갖 씨앗을 사서 문익점 선생님이 목화(모카씨 아니고요 ㅋ)를 숨겨 오셨듯, 

행여나 세관에 걸릴까 봐 옷과 책 사이에 여기저기 끼워서 많은 씨앗들을 가져왔어요. 

굳이 말하면 씨앗은 세관에서 걸리는 품목이더라고요. 


그리고 그다음 두 번째 봄때 깻잎이며, 매운 고추, 부추들을 심었지요. 

그때 처음 심은 부추가 벌써 겨울을 두 번이나 나고 

올해 다시 열심히 자라 주고 있어요. 기특하지 않나요? ^^


첫해 부추를 심고 완전히 다 자라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라면 잘라서 

부추전 해 먹고 또 자라면 만두 해 먹고 하느라고 꽃이 피는 걸 보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그다음 해도 역시 ㅎㅎ

부추가 꽃이 피기 전에 뿌리를 파손하지 않고 잘라먹으면 

추워질 때까지 계속 자라더라고요. 

그리고 겨울이 되면 그대로 말라죽은 것처럼 보여서 물도 안 주고 했는데도

봄이 되니 다시 자라더라고요. 

그렇게 올해도 다시 부추가 쑥쑥 자라고 있어요. 


조금 지나니까 그중에는 먹지 못할 만큼 굵어지고 단단해진 줄기들이 있긴 한데, 

전체적으로는 먹을만하고 제대로(?)된 부추예요. 



올해도 어김없이 깻잎과 청양고추도 씨앗을 틔우고 있어요. 

작년에 넘 일찍 틔웠다가 고생해서 올해는 일부러 조금 늦게 틔웠어요. 


올해는 우엉 씨앗이 있어서 우엉도 싹을 틔우고 있어요. 

씨앗들이 벌써 3년 묵은 씨앗들이라 발아가 이전만큼 쉽진 않은데, 

그래도 고맙게도 아직은 싹을 트워주네요. 


작년에는 오이랑 상추, 알타리도 심어봤었는데,

오이는 일조량이 부족해서 자라지 못했고

상추는 너무 다닥다닥 붙여서 키워서 다 자라지도 못하고 꽃을 피우고 바로 죽었어요. 

그리고 알타리는 잎이 생기고 조금 클 만 하니 까마귀랑 참새들이 전부 파 먹어버렸고요.

농사 쉽지 않아요. ㅎㅎ


그런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겨울에 신경 안 쓰고 방치해 놔도

이듬 해면 열심히 다시 자라 주는 부추를 보면 반갑고 고맙고 기특하기까지 하더라고요. 

저는 한국에서 화초를 키우면 한 달에 다 죽이는 마이더스가 아닌 다이더스 손이었거든요.ㅎ

그런 제가 독일에서 화분도 잘 키우고, 채소도 키우는 거 보니 신기하더라고요. 


채소를 키우다 보니 감성이 더 섬세해지는 거 같아요.

사람도 힘든 겨울을 지나고 다시 봄을 맞는 부추 보면 기분도 좋아져요. 

(부추 하나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네요 ㅋㅋ)

이런 작은 채소도 이렇게 꾸역꾸역 볕을 보겠다고 기를 쓰는데, 

말도 하고 손도 쓰고 두 발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인간이 

못할 게 뭐 있나 싶기도 해요. 


가끔씩 우울하다가도 이렇게 의외의 위로를 받기도 해요. 

좀 황당한 발상일 수도 있지만 그냥 같이 한번 웃어보아요. 

그러니까, 봄도 왔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올해도 파이팅하고 힘내서 열심히 살아보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