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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in DE/우리 하루, feat. 독일

요즘 독일 아침

요즘 독일의 아침이다.

오후 8시 정도이고 우리 집이 산 중턱이나 꼭대기에 위치한 높은 고도도 아니다.

그렇다고 강이나 호수가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종종 아침 상태가 이렇다.


매일 이렇게 짙은 안개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독일 남쪽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독일 중에 날씨가 좋은 편이라고,

간혹 내가 날씨에 대해 불평을 할 때면

주변 독일인들에게 지겹도록 들어 왔기도 했다.


요즘은 종종 아침에 짙은 안개가 깔린다.

그리고 그 안개는 마치 내가 깊은 산 속에 사는 듯 느끼게 한다.

늦은 밤부터 내린 안개는 땅 아래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밤새 눈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그렇게 쌓인 안개들은 오후 12시가 되어서야 겨우 조금씩 녹아든다.


안개를 하얀 눈과 같다고 느낀 것은

정말 묵직하게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짙은 안갯속을 걸으면 내리지도 않은 빗방울이

내 어깨 위로 어느새,

내 외투의 모자에 박혀있는 솜털 하나하나에 어느새,

내 머리카락 한올 한올에 섬세하게 어느새,

내려앉아 있다.

소리도 없는 비를 쫄딱 맞은 것과 같은 꼴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날씨를 무척 좋아한다.

내려앉은 안개 사이로 아련한 내 추억들이 피어올라 좋고,

덤벙거리는 나를 조심하라고 타일러 주는 것 같아서 또 좋다.


한치의 앞을 볼 수 없으니

앞도 보고 옆도 보고 뒤도 봐야 한다.

서둘렀다가는 넘어지기 쉽고

조금 부주의하면 마주 오는 사람과 충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치 나에게 속삭이는 것 같다.

조금 여유 있게 가라고.

조금 주의를 둘러보며 가라고.

그렇게 말없이 나를 잡아주는 것 같다.





처음에 안개는 그저 거추장스러웠다.

자전거를 타고 조금만 달리다 보면 길지도 않는 내 속눈썹에까지 안개가 내려앉아

금세 이슬로 맺히곤 하기 때문이다.

걸을 때도 앞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다.

가끔은 앞만 보고 걷다가 물웅덩이에 헛발을 딛기도 했다.

그래서 싫었다.

꼭 답답한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았고

알 수 없는 내일인 것 같아서 짜증도 났다.




내가 토마스 씨를 만나 사랑에 빠졌던

카미노의 수많은 길 중 하나였던 북쪽 길은

3분의 2 지점에서 프리미티보라는 길로 빠질 수가 있는데

그곳은 고도가 높은 지역인 데다 비구름을 항상 덮고 있기로 유명한

갈리시아 지역이다.

그곳에서는 거의 모든 아침을 짙은 안개와 시작해야 한다.


서울에서 나고 쭉 자라온 나에게

안개는 그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닿을 수 없는,

어쩌면 조금은 신비한 존재와도 같았다.

그랬던 내가 스페인에서 열흘 남짓 매일 아침,

안갯속을 걸으며 하루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걷는 일정이 끝나면 헤어질 사람들.

연인처럼, 친구처럼, 가족처럼, 동료처럼 늘 함께,

매일 매일 조금씩 800km를 함께 걸었지만,

함께라는 미래는 우리에게 없었다.

서로에게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고

예상 또한 할 수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안갯속을 걸으면서

답답한 내 미래,

알 수 없는 우리 관계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데 그래서 좋았다.

예전 같으면 그래서 싫었을 텐데..

그래서 좋았다.


알 수 없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었고

모르기 때문에 계획해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았기에 결과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희망도 품을 수 있었다.



아는 사람도 있을 거다.

안개가 걷히고 비추는 햇살이 얼마나 따뜻한지.

얼마나 반짝반짝 대지와 주변에 빛을 내려주는지.


우리 사는 것도 뭐 다를 것이 있나 싶다.

그래서 지금은 이런 날씨가 좋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독일에서 이렇게 짙은 안개를 본 적이 없다.

아니 독일 날씨는 해마다 다르다.

뚜렷한 4계절이 있지만

어떤 해의 겨울엔 폭설이 내리고

어떤 겨울엔 눈을 구경도 못 했다.

한번은 너무너무 따뜻해서 패딩을 거의 입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올해 겨울,

독일의 아침에는 자주 안개가 내리고 있다.

이런 날씨에서도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거 보니,

지독하게 우울한 독일 겨울에 어느덧 익숙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