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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in DE/어느 하루, feat. H 양

아파도 아프다고 말 못하는 몹쓸 병.

아마도 내 병명은 이렇게 긴 듯하다. 


요즘 너무 같은 이야기만 한다. 

​듣는 사람도 쉽게 위로할 수 없어 그저 듣기만 하는데, 그렇게라도 생각을 덜어내지 않으면 정말 말 그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푸념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늘 자학하고 속으로 타이르는 것도 잊지 않는다. 

혹시 듣는 사람이 지겨울까. 짜증 날까. 

그러다 내가 싫어질까봐......


​내 머릿속에 가득한 슬픔, 고통, 망상, 잡념이 모두 한 가지 테마인지라, 

나도 모르게 뱉어 놓고 속으로 후회하는 일을 반복한다. 

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인 걸 너무도 잘 아니까.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은 마음을 비우라는 것과 나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라는 말이다. 

​이 모든 위로의 말은 낱말이 모두 조각조각 찢어져 내 가슴에 박히는 아픈 말이다.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또 대부분 가진 자들의 여유에서 나오는 말이니까. 

또는 지금은 아니지만, 곧 가질 수 있거나, 가질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 아픔이 어떤 종류의 것이고 얼마나 상상 이상의 것인지 가늠할 수 없어 할 수 있는 말이니까. 

​세상엔 시간 법칙이 통하지 않는 것들이 분명 있다.

나는 분명 다른 상황인데, 전혀 다른 상황인데 비슷한 문제라는 이유로 마구 조언을 하는 것도 불편하다.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보기엔 그나마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언제가 될지 모를 뿐이지, 그 과정이 힘들 뿐이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그 과정은 생살을 짓이기는 고통이란 걸 안다. 

그리고 당사자들은 다들 불안하고 혹시 안될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고통스럽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는 혹시나 안될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아니라 역시나 안될 거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과정이다. 

​독일 병원도 보험 회사도 포기하고 손을 놓았는데, 이 상황에서 기대하는 것은 스스로 더 힘들 뿐이다. 

이렇게 포기하는 과정이 어떻게 한두 달에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 두해 지난다고 단념이 될까? 

어쩌면 나는 이따금씩 평생 동안 남몰래 슬쩍슬쩍 눈물을 닦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2016년, 걱정하다 보니 한 해가 다 지났다.

2017년, 울다 보니 한 해가 또 갔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시작은 그렇게 2년 동안 내 발목을 잡았다.

계약직 근무가 끝나고 곧 다시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일자리는 열댓 번 면접만 보고 여전히 답보 상태에 있다. 그리고 곧 검사다 뭐다 병원으로 쫓아다니다 보니 다시 구직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다시 취업을 한다 해도 이런 상태로는 정상적인 근무를 할 수 없기에 일단 미뤄둔 것도 있었다.

결국 지난 2년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누구도 없었다.

그동안 기적이라 믿었던 것들은 생각해보면 어쩌다가 그 시간에 적절한 일이 벌어졌던 것.
가능성은 적지만 일어날 법도 했던 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간절히 원하는 기적은 그렇게 타이밍에 의해 어쩌다 이루어지는 게 아닌 일이다. 

그리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조금도. 
모든 객관적인 사실이 부정적인 결과로 내게 단념하기를 은근히 강요하고 있다.



신이 있기 때문에 기적도 믿었다.
기적이 없으니까 신도 없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실 기적도 신도 우리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고 그 바람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까?
무언가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있는 사람들의 그 마음에 얼마나 끔찍한 절망만 남았을까?
결국, 그런 사람들은 그거라도 붙들고 있지 않는다면 버틸 수가 없었던 거다.


꾸준히 해오던 걷기 운동도 접고 집에만 있었다가,

1일이 되면서 다시 조금씩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시내로 주기적으로 나가면서 공부 비슷한 것도 시작했다.

지금 내 힘겨움은 시간이 지난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역 광장에 큰 시계에 앉은 새들..

징그러운데도 계속 시선을 두고 사진까지 찍었다.
요즘따라 시내 중앙역에 새들이 괴성을 지른다. 전에도 늘 이랬던가.
어느새 내겐 살려달라는 비명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집 앞 놀이터에 작은 건물이 두 개 있다.
전기 관련 건물인 거 같은데 정확히 뭔지 모르겠는, 아무튼 창고 크기의 두 건물 사이에 조금 틈이 있는데 성인이 옆으로 설 수 있는 정도다. 넓이가 한 60cm쯤 되려나...? 
그 사이로 까마귀 한 마리가 떨어져 푸드덕 거리고 있다가 날 보고 구석으로 몸을 움츠렸다. 
한눈에 봐도 도와줘야 할 듯했는데 주변에 도울만 한 것도 마땅히 없었고 다가서면 요란하게 푸드덕거려서 무섭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 하면서 긴급구조 정보를 찾다가 이래저래 한참 지나서 다시 생각이 났다.
똑똑한 까마귀 비디오도 많이 봤고 잘 나오겠지 싶어서 그냥 잊어버렸는데....
며칠 뒤에 다시 보니 그가 죽어 있었다.

난 그게 왜 그렇게 내 탓같은지..
하필이면 한 명 만난 사람이.. 도와줄 수 있었던 사람이 겁 많고 무심한 나였다니..
그리고 며칠 얼마나 우울하고 슬펐는지..

급기야 동물 다큐를 보다 울어 버렸다.
그 까마귀가 자꾸 생각나고 너무 미안해서.....
살 수도 있었는데.. 꼭 내가 죽인 기분에 죄책감이 들었다.
남편이 그런 나를 달랬다.
어디 다쳤을 거라고, 새가 그렇게 빨리 죽지 않는다며.

그런데 벌써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맘이 편치 않다.

남편은 나의 이런 면이 좋았다고 하지만 난 불편하다.
이 까마귀에 대한 미안함이 한동안은 계속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물며 내 일에는 어떤가.

나는 아직도 십수 년 전일에 이불 팡팡 하기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한다.
반성과 자책의 반복.
내가 인지하고 있는 일에도 이런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실수나 잘못을 했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래서 표면적인 이유가 나를 가리키는 게 아니여도 여전히 나는 내게서 원인을 찾고 책임감을 느낀다. 이제는 그만 나를 좀 놓아주고 싶은데 잘 안된다. 
그래서 내 안에 슬픔이 항상 끊이질 않는가 보다.



요즘은 사는 게 참 꿈같다. 

매일매일이 꿈처럼 아득하고 몽실몽실 넋이 나간 것처럼 꿈속을 사는 것 같다. 

​오늘에 분명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내일은 더 흐릿한 것이 둥실둥실 허공에 사는 것 같다.

사는 게 믿기지 않아서 지금 이 모든 것들이 믿기지 않아서.....
깨면 사라질 꿈같고 빨리 깨서 사라졌으면 하는 꿈같다.

지난가을이 가장 따뜻했던 것처럼 어쩌면 지금 겨울이 가장 추운 걸까?

눈물도 콧물도 차마 흘러 떨어지기 전에 이미 속에서 꽁꽁 얼어붙었다. 

이듬해 봄이 와도 녹지 않을 것 같은.
아니 녹지 않을.


말라붙어 꺾어진 나뭇가지에, 의미 없는 새의 지저귐에까지도 감정 이입하며 못생긴 마음으로 오늘도 참 못나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