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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in DE/어느 하루, feat. H 양

보물과 고물

  지난여름 휴가 때 3년 만에 한국엘 다녀왔다. 너무도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독일로 돌아올 때는 캐리어 두 개를 터지도록 담고도 가져오지 못해 두고 온 것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중엔 한국엘 다녀갈 때마다 가져갈까 말까 늘 고민하다 결국은 한국 친정집에 그대로 두고 독일로 돌아오곤 했던 것들이 있다. 친구들과 초등학교 때부터 주고받은 쪽지, 편지들부터 자잘한 선물이나 기념품과 내 사진들이 그것이었다. 한국을 다녀오고 어느새 두 달이 훌쩍 지났고 오랜만에 친정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가 문득 물으셨다. 


야! 너 그 지저분한 종이들 내가 다 갖다 버린다. 괜찮지?
종이들? 종이 뭐?
왜 쪽지랑 편지랑 잔뜩 한 상자에 담아 놓은 거 말이야. 
아니, 그걸 왜 버려? 나한테는 내 청춘, 동심, 추억 모든 것인데, 절대 버리지 마. 언제고 독일로 다 가져올 내 보물들이야.
보물 같은 소리하고 있네. 고물상에 팔아봐야 백원도 못 받겠다. 생전 들춰 보지도 않으면서..
그래도 절대 버리지 마. 다음에는 꼭 다 챙겨 올게. 


  돌아올 때 챙겨 갈 것들이 많기도 했지만, 왜인지 한국에 내 물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싫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여 늘 우선순위 끝에 두고 독일로 가져오는 것을 미뤄두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엄마가 또 버리신다고 볼멘소리를 하신다. 내 십 대와 이십 대의 모든 기억이 담긴 보물이 엄마에게는 한낱 분리수거 대상일 뿐이라니 섭섭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모르는 내게 그것이 보석의 의미를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 젊은 날의 모든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소중한 추억 상자가 엄마에게 처리 곤란한 잡동사니 일 뿐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보물과 고물은 모양새가 참 비슷하지만 자음 하나가 다르다. 한 끗 차이지만 단어가 갖는 의미는 또 현저하게 대비된다. 왠지 친할라야 친할 수 없는 거리감까지 느껴지는데 생김새가 그냥 비슷한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혀 다른 의미이지만 손바닥 뒤집듯 보물이 고물이 되고 고물이 보물이 되기 때문에 그랬다. 


  조부모님과 작은 집에서 내 방하나 없이 복작복작하게 이십 대 후반까지 살아오다 보니 다른 식구들에 비해 나는 내 물건에 애착이 많았다. '내' 것이 된 것은 하다못해 마시고 버리면 그만인 병뚜껑 한 개도 누군가에 받은 것이라면 소중했다. 초등학교 때 짝꿍이 준 생일 카드, 중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교회 오빠가 건네 준 초콜릿 껍질,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주고받은 쪽지, 대학생 때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수많은 편지와 사진들. 그 수많은 것들의 주인들과는 이미 연락이 끊긴 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내 추억까지 버릴 이유는 없기 때문에 시들시들해진 기억이라도 내겐 모두 소중했다.  


  언젠가부터 나만의 작은 상자를 만들어 주섬주섬 주어 담기 시작했다. 어느새 잡동사니로 차고 넘치는 그 상자를 보물 상자로 이름하고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일기장,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주고받은 쪽지와 자잘한 기념품들, 조잡한 종이 접기들까지 그것들을 매일같이 꺼내보고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귀하고 값어치 있는 것들이었다. 기억력이 탁월하지 않기에 가끔씩 꺼내 보며 과거의 소소한 추억들을 소환해 혼자서 추억 놀이를 즐기곤 했다. 내가 순수했던 때, 열정적이었던 때, 슬펐던 때, 아팠던 때, 고민이 많았던 때, 모든 시간들이 상자 안에서는 그 시간 그대로 멈춰 있었다. 


  내게는 이렇게나 소중한 것이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 분명 하찮게 보일 수 있다. 특히 우리 엄마에겐 더욱 그랬다. 언제나 쟁여 놓고 구석에 모아 놓은 나와 분기별로 전쟁을 치렀던 것 같다. 봄이나 가을에 대청소를 할 때면 엄마는 내방 구석구석 잘 숨겨 놓은 내 보물들을 꺼내 나 몰래 내다 버리기 일쑤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와 트러블이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엄마는 항상 그러셨다. 엄마에게 버럭 화내고 윽박지른 것으로도 모자라 한 밤중에 컴컴한 골목 어귀의 가로등 아래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엄마는 고물을 버리셨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추억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쓰레기 더미가 되어 버려진 것이다. 그런 몇 번의 반복을 지나 엄마는 더 이상 나 몰래 내 물건을 버리지 않으셨다. 



  몇 해전 독일로 올 때 급작스럽게 떠나오느라 내 물건들을 미처 꼼꼼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왔다. 이듬해 다시 한국을 다녀가는 길에 내 물건들을 찾아보는데 이미 상당히 많은 내 보물들이 버려진 후였다. 그때는 그게 너무 속상하고 무척 화가 났다. 엄마에게 짜증도 부리고 낼모레 마흔인 나이에 구석에서 훌쩍 거리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창피하고 그 모습이 우습다. 왜 그렇게 집착했던 것일까? 실컷 짜증내고 신나게 울고 나서 찬찬히 생각해보면 사실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보물 이라며?'
'너무 소중한 추억이라며?'


  보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하찮은 것도 보물이라고 부르는 순간 귀한 것이 되는 것이었다. 유명한 시인의 시처럼 이름을 부르고 기억하는 꽃이 의미가 되었던 것처럼,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도 내 집 마당에 품기 시작하면 나만의 화초가 되고 주인 없이 떠도는 강아지도 내 집에 머물고 내가 돌보기 시작하면 나의 반려견이 되는 그런 것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금은보화는 예쁜 데다 희소성이 있기 때문에 보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저기 우주 어딘가 다이아몬드나 금과 은으로 이루어진 행성이 있다고 치자, 그곳에 사는 생물들에게도 그것이 과연 보물일까? 온갖 보석으로 이루어진 그 행성에 보물은 발에 차이는 보잘것없는 것이고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 없는 흙 한 줌이 금가루 한 줌의 가치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런 것처럼 희미해진 추억을 곱씹도록 도와주는 작은 물건들이 내게는 보물이었다. 보물의 도움이 없다면 추억도 점점 희미해지다 언젠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추억의 매개체 없이 오롯이 혼자 기억하지 못했던 것을 잊고 지낸다 하여 내가 영원히 잊었다는 의미였을까? 또는 그렇게 잊히는 기억이 정말 보물처럼 소중한 것이 맞을까? 이렇게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보물이 고물로 전락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모르면서 안타까워했던 생각을 하니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결국 보물과 고물을 만드는 것은 생각이나 마음이 아니라 집착이었다. 확연히 대립되어 전혀 친해 보이지 않는 보물과 고물이라는 두 단어가 굳이 비슷하게 생긴 이유는 상황이나 생각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운명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잊히면 잊힌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흘러가는 시간대로 그 흐름에 뒤섞여 사는 것이 힘든 것은 집착 때문이었다. 기억에서 잊힌다고, 추억을 불러주던 어떤 것이 사라진다고 추억이 아닌 것이 아니었다. 소중하지 않아서 잊히는 것도 아니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여름 지나 겨울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시간이 가는 모습 중 하나였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것인데, 내게 들어온 것들을 그렇게 모두 끌어안고 놓치를 못했다. 사실 보물이 고물이고 고물이 보물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없어 사랑하는 것도 사람인 것처럼 다른 듯 하지만 결국 하나의 카테고리에서 만나 진다. 

  사람은 사실 참 단순하다. 이렇게 오늘도 일상에서 내려놓음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