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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in DE/어느 하루, feat. H 양

독일의 지독한 겨울


오지 않을 것 같던, 

아니 오지 말아주길 바랐던 2017년이 결국 오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남쪽 독일에 사는 내게 겨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볕과 눈이다. 

벌써 여러 번의 겨울을 독일에서 보내고 있지만, 

그 겨울은 해마다 모습이 다르고 냄새가 다르다. 

추울 때는 엄청나게 추워서 욕지기가 나오는가 하면, 

어떤 겨울은 지나치게 따뜻해서 두꺼운 외투를 몇 번 꺼내 입지 않고 지나간 적도 있다. 

볕이 하루 종일 쨍쨍하게 드는 날이 많이 없다. 

볕이 쨍쨍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나기를 퍼붓고 곧 우중충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독일에 살면 매일 그렇게 날씨에 속는다. 

날씨가 하루에도 볕이 들었다, 비 왔다 우중충했다 변화무쌍하지만 겨울이 전반적으로 그렇다. 

이런 겨울, 저런 겨울, 그런 겨울이 해마다 다르지만, 그 와중에 공통적인 것은 바로 눈. 

내가 사는 여기 남서쪽은 정말 눈이 안 온다. 

겨울은 주로 잿빛. 가끔 비. 

정말 내내 우중충하다. 



유럽의 겨울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해가 정말 빨리 진다. 서머타임을 해제해서 그런 영향도 있다. 

아침엔 8시가 넘어야 밝아지고 오후엔 4시도 안돼서 어둑어둑해지고 4시 반쯤 되면 이미 어두컴컴해진다. 

그나마 해가 뜨는 날은 4시가 넘어 어둑어둑해지지만, 

비가 오거나 우중충한 날은 8시 반이 넘어야 좀 밝아지고 오후 3시 반이 되면 이미 어둑어둑해진다. 

가끔은 독일 하늘 천정에 대형 전등을 하나 달았으면 좋겠다는 망상까지 해본다. 


결국 지난 몇 해 동안 눈이 온 걸 두 손으로 꼽고 손가락이 남을 정도로 별로 없던 것 같다. 

특히, 작년과 재작년은 한 번도 못 봤다. 

아니다. 한두 번 보았었나? 왔다 한들, 아마도 진눈깨비처럼 오는 둥 마는 둥 했을 것이다. 

펑펑 내렸다면 내가 잊을 리가 없을 테니.

그런 독일의 겨울에 2017년이 되고 벌써 두 번째 눈이 내렸다. 

눈이 오자 집안에서 어쩌지, 어떡하지, 안절부절 왔다 갔다 하면서 나갈 궁리를 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통은 1월 말까지는 두는데 올해는 일찍 거뒀다. 

다른 해보다 유난히 큰 나무를 세웠더니 자꾸 기울고 위태위태해서 그냥 일찍 버리기로 했다. 

우리 동네는 아파트 단지라(한국식으로 치면 빌라 같은) 트리 버리는 데도 가구 버릴 때처럼 신고하고 돈을 지불해야 하므로, 내 키보다 훨씬 큰 트리 나무를 질질 끌고 시댁까지 걸어갔다. 

걸어서 3,40분 정도의 거리에 시댁으로 가져가면 시댁에선 나무를 대충 잘라서 쓰레기통에 추가 비용 없이 버릴 수 없어서 내가 가기로 했다. 

아마도 오늘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나도 귀찮아서 절대 안 했을 텐데..

눈도 오니 눈 구경할 겸 커다란 트리를 들고 나왔다. 

지나가는 독일인들이 저 동양 여자가 뭐 하는 건가 연신 고개까지 돌리면서 쳐다본다. 

내가 고작 크리스마스 나무를 버리겠다고 시댁까지 끌고 간다고 그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런 시선보다 내 안중에는 오직 눈이었다. 


빨리 시댁에 나무 버리고 눈 밭을 뛰다닐 생각에 왜 그리 설레는지, 

커다란 나무를 끌고 십분 걸으니 송골송골 맺히는 땀 방울이 눈송이처럼 기분 좋았다. 


"왜? 벌써 가려고?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

"아뇨. 두 분의 오붓한 일요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방해라니. 우린 네가 오면 언제나 이렇게 기쁜데."


그리고 막상 시댁에 도착에 시댁 정원에 나무를 버리고 바로 가려니 시댁 어른들이 눈에 밟혀서 또 엉덩일 붙이고 수다판을 벌였다. 내가 와서 좋으시다는 시어머니 눈빛이 다른 날 보다 유난히 더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 시아버지랑 셋이 남편 뒷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오지 않은 것이 내심 섭섭하셨던 것이다. 

케이크 몬스터인 남편이 시댁에 올까 싶어 시어머니께서 아침부터 케이크를 구워 카톡으로 남편과 내게 보냈는데, 카톡이 온 것을 알았지만 둘 다 보는 것을 잊고 나는 시댁에 와버렸고 남편은 집에 있었다. 


"내가 케이크 사진 보낸 거 봤으면 토마스도 왔을 텐데..."


하시며 은연중에 섭섭함을 내비치시는 시어머니가 왜 그리 짠하게 느껴졌는지.

코 앞에 사는 아들, 자주 오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볼 때마다 그리 반가우신 모양이다. 

아마도 시누가 멀리 살아 자주 오지 못하기 때문에 허전함도 두배로 느껴서 그러신 듯싶다. 

그렇게 남편 대신 시부모님과 남편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물을 두 컵이나 들이켠 후에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눈 구경해야 한다며 아쉽게 인사를 하고 나는 동네 길바닥이며, 들판이며 여기저기 내 발자국 남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찌나 신이 나던지, 불혹의 나이에도 초등학생처럼,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길고 긴 겨울에 볕이나 눈이 드는 날은 꼭 이렇다. 

폴짝폴짝, 쭐레쭐레 동분서주하는 내 모습을 보니 몇 가지 잡생각들이 들었다. 

자주 느끼고 몰랐던 것도 아닌데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행복이란 게 참 별거 없다는 것. 참 소소한 것에 기분이 좋아하지고 즐거워지는 것. 

그런 것이 행복이었다. 


하루 종일 일하는 남편이 맛있는 저녁을 기다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느끼는 그것, 

우연히 들른 상점에서 콩나물을 발견했을 때, 산 중에서 산삼을 발견한 듯한 벅찬 기쁨, 

우중충한 잿빛 하늘에 슬그머니 떨어져 내리는 아침 햇살, 

기다리고 고대하던 눈이 폴폴 내리는 어느 겨울 오후, 

한 편으로는 얼마나 사는 것에 특별한 이벤트가 없으면 그럴까 싶은 짠함도 있지만, 

사소한 것에 기분이 좋아하지고 행복하다 느끼는 것은 역시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되는 것인가. 

그렇다고 커다란 고민이 없는 것도 아닌데 사람 사는 거, 다 그런 거니까. 


정말 오랜만에 독일에 눈이 왔다. 

폴폴 내려 소복이, 풀풀 나부껴 온 동네 여기저기에, 

뽀득뽀득 그 사이로 첫 발을 내딛는 발걸음. 

내가 처음 독일에 왔던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어김없이 2017년은 왔고, 서른과는 또 다른 마흔이 되었다. 

결국은 시간은 이렇게 흐른다. 

눈 길을 걸으며 집으로 쭐레쭐레, 

시댁에서 케이크 한 조각 얻어서 눈을 맞으며 집으로 쭐레쭐레, 

아주 오랜만에 눈 구경 실컷 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