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때까지 나는 거의 완전한 채식주의자였다.
어렸을 때 살던 마당에서 키우던 병아리가 닭이 되었는데,
그 닭이 돌아다니면서 화단의 흙을 다 파내고
마당 여기저기에 배설물을 흘리고 다니는 통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날을 잡아 진짜로 잡아 버렸다.
닭 잡던 그 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닭을 잡을 줄 모르셨던 할아버지가
닭의 머리부터 쳐버리셨고,
머리가 잘린 닭이 그래도 십여 분을 푸드덕 날아다니며 온 마당에 피를 흘리고 다녔다.
어린 내게 너무도 강렬한 기억이어서 그 이후로 살아있는 생물로 만든 것을 먹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그때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했다면
지금쯤 키가 한 5cm는 더 컸을 것이고 종아리가 휘지 않고 딱 달라붙었을 텐데 아쉽다.
그렇게 살다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먹기 시작해서 지금은 꽤 잘 먹는 편이다.
여전히 막 좋아서 찾아다니는 수준까지는 아니고,
닭은 퍽퍽한 가슴살만 먹고 윙이나 닭다리는 아직도 별로 잘 먹지 못한다.
삼겹살은 비계 부위 다 잘라내고 먹거나 못 먹고,
스테이크에 비계 부분은 씹어 넘기질 못하고 순 살로만 먹는다.
그래서 달걀 후라이는 먹어도 삶은 달걀도 막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다.
오늘도 서두가 길어졌는데(ㅠㅠ)
여튼, 신기한 것이 독일로 이주해 오면서 안 먹던 음식들이 그렇게 먹고 싶어진다.
순대며, 삼겹살, 한국식 치킨 등등.
그중에 메추리알 조림이 자주 먹고 싶었는데,
독일에서는 메추리알 구하는 게 쉽지 않다.
대도시 위주의 대형 아시아상점에 가면 비교적 비싼 가격으로 살 수가 있는데,
그마저도 늘 갖춰져 있진 않은 편이다.
시내까지 장 보러 늘 가는 것도 아니고 ㅠㅠ
그런데,
며칠 전 독일 대형 마트에 메추리알이 특가로 나온 것이다.
작은 한 팩에 1,99유로
고민하지 않고 두 팩을 집어서 집으로 왔는데,
우리 토마스씨, 의외의 반응.
"여보, 이거 뭐에요??"
그랬다.
남편은 메추리알을 실제로 본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자기가 기억하는 내에서는 처음이라고는 하지만,
내 생각에 본 적은 있었지만 기억을 못 하니, 그냥 처음이라고 하는 것 같다.
여튼, 중요한 것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다는 것!
그래서 조림을 하기 전에 굳이 꼭 자기를 위해
후라이용 한 개, 삶은 것 한 개를 남겨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겨 주니,
토마스 씨 어린이, 메추리알로 후라이 하셨어요
일반 달걀과 비교를 위한 내가 투척한 비교 후라이
후라이도 해 먹고,
삶은 것도 하나 먹고 혼자서 싱글벙글.
처음 먹어봤다면서.
그런데 또다시 급 실망, 늘 먹는 달걀 맛이라고. ㅎㅎ
뭐, 그럼 메추리알도 달걀인데 무슨 초코 맛이라도 날 줄 알았나? ㅋㅋ
그리고 조림을 들고 신나게 시댁으로 향하는 토마스 씨.
시댁 식구들에게 보여주니 역시 시부모님들도 메추리알의 존재를 알지만,
본 적도 있지만, 한 번도 본 적 드셔본 적은 없다고.
옆에서 토마스 씨 아는 척한다.
"먹어 봤는데요. 그냥 달걀이랑 맛이 똑같아요!"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모습 보는데, 왜 그렇게 웃긴지.
시아버지도 조림으로 된 메추리 알 하나를 드셔 보더니.
"음. 작은 달걀 맛이군."
아, 정말 신기했다.
다른 독일인들은 먹어봤을 수도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모두 달걀처럼 당연하게 먹는 것 아니었다.
문화 차이가 뭐 거창한가, 소소한 이런 일상이 문화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소소한 발견이 작은 웃음을 주기도 하니 문화 차이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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