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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in DE/우리 하루, feat. 독일

내 남자의 잠꼬대


남편은 바닥에 머리가 닿으면 1,2분 안에 곧 잠이 들지만 작은 소리에 민감하여 또 잘 깨는 편이다.

그에 반해,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하여 한두 시간 뒤척이지만 일단 잠들면 잡음에 둔감하여 비교적 잘 잔다.

남편이 아침에 일찍 출근하거나 나갈 때는 내가 잠들어 있어도 가벼운 입맞춤 인사를 꼬박꼬박 하고 가는데, 가끔은 그것조차 모르고 잘 때도 있다.

어쨌든 우리의 수면 스타일은 완전히 반대다. 그래서 처음에 꽤나 고생했다.


잠귀가 엄청나게 밝은 남편이 매번 먼저 잠들고 내가 잠들기까지 뒤척이는 소리에 깨기 쉬우니 서로 너무 힘들었다.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럼에도 부부는 함께 자야 한다는 생각을 남편은 굽히지 않았고 자신이 노력하겠다고 매번 다짐했었다.


사실, 그때 나는 남편이 바꿀 수 있는 습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 제대로 잠도 못 자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따로 자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몇 개월 고생하다가 어느 날 문득, 불현듯 함께 자는 것에 서로 전혀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했다.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변화의 시간을 지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인지했던 일이었다.


벌써 몇 년이 지난 일이지만, 신기했다. 남편이 스스로 함께 잘 수 없어서 얻는 스트레스와 수십 년 익숙해져 신체의 일부와 같은 습관을 버리는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 사이에서 나름의 고군분투는 분명하게 보였다. 그때마다 나는 어느 쪽도 상관없으니 해보다 안돼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만 당부했다.

남편의 다짐을 믿지 않았다기보다 그것으로 인해 다른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부부라고 꼭 함께 자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편하게 생각했던 것도 있었다. 기대하지 않고 그냥 기다렸다. 그 결과가 우리 사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사람이 타고난 성향이나 성격 같은 것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간혹 변하기도 하겠지만 정말 보기 드문 경우이기 때문에 그 드문 경우가 나일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남편이 고쳐주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그래서 신기했고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하니까, 따로 자는 건 싫어.


어떻게 바꿀 수 있었느냐고 물었던 내게 남편이 한 대답이었다.

본인도 스스로 변했다고 자각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은 내 자리가 비어 있으면 오히려 잠이 안 온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덕분에 남편이 먼저 취침에 들어갈 때는 좀 더 깨어 있고 싶어도 덩달아 이끌려 침대로 간다.

함께 누워 오늘 하루에 있었던 일과 중요한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 곧 잠이 드는데, 문제는 그때부터다. 이야기가 끝나고 이제 자자라고 말하고 탁자의 불을 끄면 남편은 곧 잠이 든다.

보통 1분, 길어야 2분이면 남편은 잠이 들고 나는 멀뚱멀뚱 그렇게 한 시간 길면 두 시간 이상 잠에 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매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주 그렇다. 이제는 내 차례인가?


잠들기 전 깨어 있는 동안 가끔씩 남편의 잠꼬대를 듣게 되는데 남편은 잠버릇만 바뀐 것이 아니라 잠꼬대까지 바뀌어 있었다. 원래 잠꼬대를 자주 하지는 않아서 남편의 잠꼬대를 듣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신혼초에 가끔 잠꼬대를 들으면 알아들을 수 없던 독일어 한두 마디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남편이 한국어로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전에도 여러 번 쓴 적이 있지만, 남편은 한국어를 못한다.

예전에 독학으로 서너 달을 혼자 배운 적이 있어서 꽤 많은 동사를 알고 있긴 했었지만,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니 당연히 거의 모두 잊어버렸다.

나와 함께 살면서 원래 알고 있던 한국어 한 두 마디와 내가 자주 쓰는 간단한 문장들 위주로만 기억하고 있는데, 남편의 응용력은 남달라서 그 몇 개 안 되는 것을 아주 적절한 상황에 써먹곤 한다.

그렇게 자주 응용해서 써먹다 보니 몇 개 안 되는 단어와 문장이지만, 그것들만큼은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왜? 배고파. 아니야. 배불러. 미안해. 사랑해. 보고 싶어. 하지 마. 여보. 예뻐. 귀여워. 좋아. 많이 많이. 괜찮아? 괜찮아! 그런데, 비싸. 싸. 제육볶음, 된장찌개 같은 음식 이름 등등.


실생활에서 쓰는 유용한 단어들 위주여서 간단한 대화가 가능해서인지 그 잠깐의 상황만 봤을 때는 꽤 능숙해 보일 정도다. 재밌는 건 잠꼬대에서 그런 단어들만 쓰는 것이다.


여보? 여보! 여보.. 좋아.

남편이 자주 하는 잠꼬대 중 하나이다. 자다가 나를 찾으며 여보? 하고, 그 후에 옆에 있음에 안도하고 여보! 하다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여보.... 음냐음냐... 좋아.. 하면서 마무리한다.


가끔은 자다가 정말 뜬금없이 하는 잠꼬대도 있다.


사랑해. 사랑해에 에.. 이.. 음냐.. 음냐..,


정말 밑도 끝도 없이 한 번씩 내뱉는 소리다. 처음에 이 잠꼬대를 들었을 때, 뭐라고 물었지만, 전혀 대답이 없었다. 그냥 자면서 나온 소리였다. 왜인지 한 번 더 듣고 싶서 가끔 물어보면 대답 없이 여전히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는 남자다. 이런 한국어 잠꼬대가 재밌어서 다음 날 물어보면 전혀 기억도 못할뿐더러, 평생 그런 적 없다고 믿지 않아서 녹음까지 해서 들려줬었다. 본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아 했다.


미안해.


사랑한다는 잠꼬대 다음으로 가끔 하는 잠꼬대 '미안해'인데, 이 말은 정말 생뚱맞다. 드물게 우리가 다툰 날 밤에 몇 마디 옹알거리는 편이고 평소와 같이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뜬금없이 이런 잠꼬대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 말을 들으면 왜인지 귀엽게 느껴지면서도 어딘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 번씩 머리를 쓸어주게 된다. 주로 울거나, 소리 지르는 내 잠꼬대에 비해 남편의 잠꼬대는 그래도 귀여운 편이다.


여전히 나는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극복하고 싶은 이유나 강한 동기가 있으면 사람은 가끔 변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 동기나 이유 또한 스스로가 원했을 때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지, 다른 누군가가 주는 동기나 이유는 그저 강요이고 스트레스일 뿐이다. 작은 습관 하나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지,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이미 내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남편의 맘에 들지 않는 점, 변하기를 바라는 점, 그런 것들 생각하고 집중하는 것보다 그가 가진 다른 커다란 장점을 보는 것이 낫다.


남편의 한국어 잠꼬대를 듣고 있으면 그 자연스러움에 웃음이 나고 몇 마디라도 아내의 언어를 쓰겠다고 노력하는 그의 마음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