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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My tripadvisor/고향, Korea

가톨릭 - 1. 울산, 언양 성당과 공소들



 



2년 전, 스페인의 성지인 카미노 도보 순례를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사 신부님을 통해 알게 된 성모기사회. 이 공소의 여정을 통해
성모님께서는 어떤 선물을 주실지,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했다.

 

 

 

 



 - 출처 : iKolbe.com,  416호 2011. 9                              





 

 

 

 

교회의 역사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


  일제 강점기 때 울산 지역에 세워져 현재까지도 역사가 숨 쉬는 부산교구 최초의 가톨릭 성당. 그 곳으로 출발하기 위해 정오가 훨씬 지난 시간에 한남동 본원에서 수사님을 만났다. 출발과 함께 성모님께 드리는 묵주 기도로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여정을 시작했다.
  중천에 떠 있던 해마저도 뉘엿뉘엿 져 갈 때쯤, 우리는 긴 시간을 달려 첫 번째 목적지인 울산의 언양 성당에 도착했다. 언양 성당은 아파트 단지 뒤에 위치해 있어서 종탑이 보이기 전까지는 그곳에 성당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언양 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전래와 같이 자발적인 200년 역사를 이어 온 언양의 자랑이다. 그래서일까, 성당으로 오르는 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오래되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연륜이 느껴졌다.
  성당에서 박만선(F. 하비에르) 형제님의 안내로 먼저 신앙유물 전시관을 관람했는데 술술 막힘없이 깔끔한 설명에 한 번, 잘 보존되어 있는 내부 환경에 또 한 번 놀랐다. 자발적으로 신앙촌이 형성되고 신앙생활을 이어 와서인지 성당도 묵직하고 듬직한 느낌이었다.

  미사 시간이 되면서 신자들이 하나둘 성당으로 모여드는데 그 느낌이 참 가족적이었다. 그렇게 주일 저녁 미사를 언양 성당에서 드리면서, 지금까지 이곳을 지켜 주신 것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한결같이 지켜 달라고 기도드렸다.
  1850년에서 1861년까지 프랑스 선교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을 최양업 신부님이 맡아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 신자들을 위해 순방했다고 한다. 그때 이곳을 중심으로 신앙촌이 형성되어 활발한 전교 활동과 신앙생활을 했던 공소들 중 아직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 공소들, 내일 우리가 갈 곳들이다.

 

 

 

 

 

 

 

 

언양 성당 신앙유물전시관을 안내하는 박만선(F.하비에르)

 

하선필 공소 앞 뜰에 소박한 성모상과 종탑

 

 

 

 

빛을 잃어 가는 마을의 보물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영남의 알프스라 불리는 산자락을 옆에 끼고 언양의 북쪽 상선필 공소부터 하선필 공소(인보 성당 소속), 직동 공소, 순정 공소(언양 성당 소속), 길천 공소, 궁근정 공소, 살티 공소(월평성당 소속)까지 돌아보는 데 약 반나절 정도 걸렸다. 물론 차가 있었기에 반나절이었지 도보나 다른 교통편을 이용했다면 하루에 다 돌아보지 못할 정도의 거리였다. 처음 방문했던 곳이 상선필 공소였는데 산길을 따라 오르면서 ‘얼마나 더 올라가지? 이쯤이면 다 왔겠지!’하는 생각을 서너 번 할 때쯤 그곳에 도착했다.


  산중의 공소, 작고 아담한 그곳은 흡사 정자 같은 느낌이었다. 시골에서 사람들이 정자에서 쉬어 가듯 이곳에서 신자들이 쉬어 가고 마음에 안식을 얻지 않았을까. 이제는 미사도 없고 신자들의 모임마저도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이곳에, 어르신들 이마에 켜켜이 쌓인 주름살처럼 늘어진 거미줄과 다 찢어진 문창호지가 세월의 흔적과 현재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제대 주변으로는 아직 관심을 받는 반가운 흔적이 보였다. 6세대에 31명의 신자들이 번창했던 이곳은 여전히 깊은 대자연 속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지만 왠지 조금 쓸쓸해 보인다. 그 아쉬움을 그대로 남겨 둔 채 다시 하선필 공소로 떠났다.


  하선필 공소는 상선필 공소와 마찬가지로 최양업 신부의 전교 시절에 형성된 교우촌이라고 한다. 곧 찾게 될 살티 공소와 함께 신앙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하선필 공소도 다른 공소들처럼 도시로 하나둘씩 떠나보내고 남은 신자들과 함께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공소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지 못했던 나는 이 두 곳을 보기 전까진 ‘왜 사제가 상주할 수 없을까? 그냥 상주하면 안 되나?’하는 무지에 가까운 생각을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제 두 곳을 보았을 뿐인데 잠시라도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됐다. 이곳에서 어렵사리 신앙생활을 이어 오신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상선필 공소보다는 하선필 공소가, 하선필 공소보다는 직동 공소가 정리도 잘 되어 있고 비교적 관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상선필 공소보다는 지역적으로 아래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신자들이 찾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활성화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덧 나는 혼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공소 앞 마당 성모 동산(위쪽)과 잘 관리된 순정 공소(오른쪽)
 

 

 

 

 

공소, 한여름 밤의 꿈


  서울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란 데다 지방에 친척도 없던 나는, 처음 공소들을 보기 위해 출발할 때 나들이 떠나는 아이처럼 즐겁고 설레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상선필 공소와 하선필 공소를 보고, 순정 공소로 이동하면서 어느 순간 그런 마음들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위로라도 하듯 그 다음에 만난 순정 공소는 입구부터 참 예쁘고 아담했다. 아마도 돌아본 공소 중 가장 예뻤던 것 같다. 멀리 보이는 순정 공소의 팻말부터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 사랑스러웠다. 입구에 들어서자 커다란 개 한 마리와 강아지 한 마리가 짖어 대며 우릴 맞아 주었고 앞선 두 곳보다 훨씬 큰 성모님이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또 다른 팻말 “사제관.” ‘이곳에 사제관이 있다니.’하고 생각하는데 그곳에서 한 신부님이 나오셨다. 신부님께 동의를 얻어 공소 내부를 둘러본 다음, 생태 환경 사목을 맡고 계시는 신부님과 몇 마디 주고받기 시작했다가 길어졌다.

  현재 우리나라 공소들의 현주소, 교회에 알려지지 못한 순교자들 등 여러 안타까운 이야기들이었다. 신부님은 103인 순교 성인들과 다르게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감 없이 있다가 세월이 갈수록 잊히는 그들(무명 순교자)을 많이 아쉬워하셨다. 실제로 공소 부근에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의 무덤이 있으며 그 자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지는 않았겠지만 우리가 아니면 누가 또 그들을 알아주고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이렇게 공소 주변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공소도 그렇게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공소가 사라져 가는 것도 그 옛날 순교자들의 기도와 희생이 묻히는 것과 같은 맥락일 수 있다. 주교님들까지도 배출한 마을의 자존심인데… 신자가 없다고 공소를 없애야 할까? 없앨 생각부터 했던 건 아닐까? 나부터 반성해 본다. 언젠가 분명 사람들로 바글바글했을 공소들,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 사람들…. 공소 활성화를 위해 신자를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 신자들이 떠나지 않고 이곳을 지켜 가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교회를 있게 한 공소들은 어쩌면 교회의 가장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공소들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가톨릭의 미래에서 기본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신부님의 하소연 같은 현실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고 속상해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다시 길천 공소로 향했다.

 

 

 

 
길천 공소 전경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길천 공소는 순정 공소처럼 신부님이 상주하고 계시면서 비교적 관리가 잘되는 곳이었다. 다소 우울하고 답답한 공소들을 둘러보고 내려온 탓인지, 길천 공소의 희망적인 기운은 마른 하늘의 단비같았고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그러나 이곳도 도시 개발로 곧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순간 가슴이 먹먹해 왔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마을을 편리하게 개발하는 운명에 놓인 길천 공소.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본당과 거리가 가까워져 공소의 기능이 약화되고 있긴 했지만 분명 지금은 잘 운영되고 있는 듯 보였다. 이곳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 본당에서 하지 못하는 것들만 하는 것이 공소의 역할은 아닐 텐데,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고 해서 기능을 상실한 것처럼 보는 건 아닌가하고…. 이곳은 소모임이나 나눔을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인데 그런 역할을 강화하면 주민들의 신앙생활에 공소가 일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은 개발 과정에서 필요하면 부서지고 말 길천 공소를 생각하니 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궁근정 공소는 길천 공소에서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 정도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궁근정 공소는 길천 공소보다 덜 했지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공소 내부에 전시된, 이곳을 함께 보수했던 예전 사진들을 보고 있으니 뚝딱이는 망치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사람의 관심이 아직 남아 있는 듯 기운이 느껴졌다. 공소 내부가 시원하고 깨끗해서 의자들만 제대로 맞춰 놓고 당장 미사라도 드리고 싶은 곳이었다. 궁근정 공소는 1950년 이후에 생긴 많은 공소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마치 그 소임을 다하고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그곳에 머물고 싶었지만 살티 공소에 가기 위해 궁근정 공소에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궁근정 공소 전경(위)과 제대 (아래)
 

 

 

 

 

 

부산 교구, 첫 공소인 간월 공소에 살던 교우들이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만든 살티 공소

 

 

 

살티순교성지 역사에 대해
설명 중인 김현(루치아) 자매님

 

 

 



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임진왜란 때 ‘화살을 만들던 자리, 살 수 있는 터’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살티 공소.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때 죽림굴로 숨어들었던 교우들이 경신박해와 병인박해를 피해 이곳까지 모여들었다. 살티 공소는 1868년에 설립된 곳으로 부산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이다. 입구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고 산새에 매미 소리가 들릴 만큼 주변은 참 조용했다. 공소 안으로 들어서면 더욱더 조용하다. 다른 공소와 달리 낡은 오르간까지 갖춰져 있고 성모상과 작은 십자가에서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보통 신자들이 늘어나면 공소를 짓는데 살티 공소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살티 공소까지 박해를 피해 온 신앙 선조들은 석남사까지 숨어 들었는데, 당시 관헌들이 근처까지 왔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경주로 지나쳐 갔다고 한다. 꼭 석남사가 가톨릭과 무관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살티 공소도 산중에 위치했는데 석남사는 이보다 더 산중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공소 안, 오래된 나무 바닥에 앉아 있다 보면 왠지 목숨도 두렵지 않았던 신앙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힘들게 지켜 온 신앙 선조들의 덕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래서일까, 고마운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아직도 이곳으로 도보 성지 순례를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스페인의 도보 성지 카미노처
럼, 우리나라도 한 지역의 공소들을 포함한 성지 순례 루트를 잘 정비하고 많이 홍보하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도 최양업 신부님의 업적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신부님은 살아생전에 얼마나 많은 곳을 다니셨던 것일까? 감탄과 감동이 계속됐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가서 최양업 신부님을 만나 뭐든 돕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다소 엉뚱한 생각과 함께 살티 공소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김영제(베드로)와 김 아가다 순교자의 묘가 있는 근처 살티 순교 성지로 이동했다. 푸른 나무가 가득하고 멀리 밀양이 보일 것만 같은 탁 트인 시야와 함께 높고 푸른 하늘이 있는 그곳은 순교자의 삶을 위로하는 듯 마냥 평화로웠다. 카메라의 셔터 소리로 우리가 다녀감을 알리고, 또 한 사람의 자손이 당신들의 삶을 기억하고 간다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꼭 옆에서 듣고 계셨으면 하는 바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