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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in DE/오늘 하루, feat. Thomas 씨

선물 못 하는 남자 / 독일 결혼식

독일은 보통 결혼식이 두 번이다.
시청에서 혼인 신고와 동시에 서약과 반지 교환등 간략한 예식이 한 번.
피로연같이 친지와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해 파티처럼 한 번.

그런데 내 경우처럼 외국인과 결혼한 독일인은 결혼식이 세 번이 되는 경우도 많다.

외국인의 나라에서 그 나라 방식으로 결혼을 하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결혼기념일도 세 번.


(사진 : 우리 웨딩 포토 )



토마스씨는 진짜 날짜 기억을 잘 못한다.
부모님이나 가족 생일도 적어 놓고 챙기며,
일주일에 한 번씩 거의 세뇌하듯 외우게 했던 내 생일도 완벽하게(?) 외우는 데까지 1년 반이 걸렸다. ㅠ


우리는 독일에서 시청 결혼식, 한국에서 한국식으로 두 번 결혼을 했는데,

시부모님만 모시고 독일에서 한 시청 결혼식은 어떻게 하다 보니 내 생일날 하게 되었다.
혼인 신고와 동시에 이루어진 결혼이라 우리는 이 날 하루만 결혼기념일로 정하고 챙기기로 했는데..
(독일에서 피로연 같은 결혼식은 잠정적 연기였지만, 과연 하게 될런지..ㅎㅎ)
워낙에 날짜 기억 못하는 토마스의 강력한 주장도 있었다. ㅎ


( * 덧붙여 설명하면, 독일은 한국처럼 혼인 신고를 딱 하면 신고하는 그 날 몇 분 만에 뚝딱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주지 관청에 혼인 신고 서류와 첨부서류를 제출하면 거주지 관청에서 다시 중앙 관청으로 서류를 보내 심사를 한다.
심사가 끝나고 정상적으로 진행되면 거주지 관청에서 결혼 허가가 났다며 통보를 해오고,
시청에서 결혼 가능한 날짜들을 몇 가지 선택지로 알려주면 그중에서 가능한 날짜를 골라 시청에서 결혼식을 한다.
주례사가 있고 반지 교환하는 식순이 정식으로 다 있다. 이때, 친구나 친척들을 모두 불러 크게 올려도 괜찮지만,
대부분은 그냥 부모님이나 가까운 친구 한둘 정도만 불러 의식처럼 정말 간단하게 식을 올린다.
그리고 우리 부부처럼 그냥 부부나 절친 한둘만 불러서 예식만 하고 그냥 끝내기도 한다.
시청 결혼식이 곧 혼인 신고의 날이 되는 것인데 최대한 비슷한 날짜를 맞출 수는 있지만,
딱 내가 원하는 날짜에 결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류 제출부터 결혼식까지, 특히 외국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아무리 빨라도 최소 2달 정도는 걸리며

보통 3개월가량 소요된다. 중간에 연휴가 낀다거나 서류가 한 번 반려라도 나면 두 배 정도 걸린다.

우리 부부처럼 6개월 이상 걸리기도 한다. )


그런데 선물 센스 없어서 선물을 진짜 잘 못하는 토마스가
내 생일 겸 결혼기념일 선물을 자꾸 한번에 퉁치는 거다.


내게 그가 했던 첫 생일 선물이자, 첫 선물은

커다란 박스를 신문지로 정성스레 포장한 박스였다.



박스를 열어 보니 다시 작은 박스가 들어 있고 다시 박스를 열어 보니 또 박스.

그런식으로 서너 박스를 포장하고 정작 선물은 주먹만한 물건을 다시 신문지로 돌돌.

열어 보니 그 선물은 바로 비눗방울.


도대체! 왜! 왜 때문에!! 비눗방울을 내게 선물한 거지?
물어보면 나름대로 이유는 또 있다.

눈오면 멍멍이 마냥 좋아하고 봄이 되면 민들레 뽑아다 후후 불면서 좋아하는 중년의 외국인 아내.

민들레 홀씨를 한번에 다 날려 버려야 소원이 이루어진다며 볼에 바람 빵빵하게 넣어선

훅훅 불어대는 나.

거리에서 커다란 비눗방울 이벤트 하면 좋다고 그 앞에서

어린아이 마냥 넋 놓고 구경하는 걸 보면서 비눗방울 선물 하면 좋아할 줄 알았단다.

하면서 덧붙이는 말이, 구하기 어려웠다고. 허허허.

어이, 남편, 토마스 씨!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아?




정말 센스가 없어도 이렇게 없나.

이런 센스를 잘 아는 시어머니가 남편 대신 내 생일과 결혼식 날 커다른 꽃바구니를 선물로 주셨다.

남편한테 아직 못 받아본 꽃을 시어머니께서 선물해 주신 거다. ㅠㅠ

그래도 나는 그냥 어이없어 웃고 말았지 많이 섭섭해 하진 않았다.





나는 진짜 선물에 둔감해서
로션 하나 줘도 좋고 잊고 지나가도 그닥 별로 섭섭해 하지도 않는 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잘 챙기지 않는 남편이다보니 최소한 일년에 한번은 챙겨받아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내년 부터는 한국에서 한 결혼식 날짜를 결혼기념일로 정하고

생일은 따로 생일만 챙기기로 했는데

문제는 내가 한국에서 결혼한 날짜를 잊어버린 것이다.

어디에 메모를 해두지도 않고 그냥 기억이 나지 않는 거다. ㅠㅠ

토마스씨 만큼 나란 여자도 무지 둔감하다.

어릴 땐 기념일 하나하나에 일일이 집착하고 살았는데,

살다보니 조금씩 나이 들고 중년이 되다 보니 좀 무뎌졌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 정도 일 줄이야. -_-


토마스씨에게 물어봤다.

우리 한국 결혼식이 언제야?

당연히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어떤 생일 선물보다 감동이었다. ㅋㅋ

워낙 날짜 기억 못 하는 남편인 걸 잘 알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에게는 선물도 선물이지만 이런 반전은 선물보다 더 큰 감동을 하기도 한다.

(남자들이 놓치는 부분이다. 여자들은 선물로 인해 관심과 사랑을 느끼고 싶은 것일지도)



이런 나의 노력(?)에 그가 이제 선물 다운 선물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휴대폰 케이스와 헤어 고데기.

선물 못 하는 남자, 그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