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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것저것/보고 느끼고, 영화 외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 스포 많음.


언젠가 무심코 틀었던 TV에서 이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그때 장면이 어린 케빈이 엄마의 방을 물감총으로 망쳐놓고도 기세 등등하게 엄마를 노려보던 모습이었다.


"어때? 화나지? 약 오르지?"


그 어린 꼬마가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는데, 이런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어떻게 하면 엄마를 화나게 만들 수 있는지 연구하는 아들처럼 악에 받친 눈빛이었다. 

일종의 의구심과 호기심이 동시에 일어 그 장면은 나를 주저앉히고 영화에 집중하게 했다. 


지금도 뭐 유창하진 않지만, 당시 내 독어는 더욱 형편없던 시절이었기에 어지간하지 않으면 독어로 된 방송을 5분 이상 집중해서 보지 못하던 때였다. 한글 자막은 고사하고 독어 자막도 없이 독어 더빙된 영화를 보자고 마음먹었을 정도로 영화에 대해 알고 싶었다. 

케빈이 말을 하지만 엄마라는 소리를 하지 않고 엄마말을 따르지 않아 청각검사를 하러 간 장면.

그렇다면 나는 왜? 그리고 이렇게 귀엽고 어린 케빈은 왜? 



단순한 호기심에 시작한 영화는 내내 더 많은 물음표를 던졌다. 

영화는 차곡차곡 물음표를 던지는데, 마치 커다란 물음표 모양의 퍼즐을 현재로 던져 놓고 과거를 오가며 퍼즐 피스를 맞추어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서서히 맞닿는 철로처럼 하나가 되면 물음표 모양의 퍼즐도 완성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멍해 있었다. 

내용도 과정도 충격이었고 감독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쉽게 와 닿지 않았다. 

당시 내 독어가 부족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두 번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었기에 그대로 잊혀진 영화였다. 

찜찜한 영화라는 기억으로. 


며칠 전 볼만한 영화를 뒤적거리다가 이 영화가 생각나서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보게 되었다. 

두 번을 보아서였는지 중간중간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이해되면서 영화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나의 느낌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모성에 대한 영화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성악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조금 다르게 느꼈다.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모성'만이 아니었다. 

영화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이다. 

우리나라에서 영화 제목을 바꾸면서 비교적 잘된 네이밍이란 생각을 했다. 

영화는 케빈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면서 동시에 케빈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모성을 포함한 케빈과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영화를 보게 된 것과 이 영화의 출발점이 같다. 

바로 '왜?'라는 의문이다. 


"케빈이 왜?"


영화의 출발점은 또한 영화의 도착점과도 일치한다. 

엔딩 부분에서 케빈의 엄마인 에바가 케빈에게 질문을 한다.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화와 함께 늘 따라다녔던 한 마디. 


"케빈, 너 왜 그랬니?"


이것은 비단 케빈이 저지른 살인을 두고만 물었던 것은 아니다. 

그동안 나한테 왜 그랬냐는 에바의 질문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케빈이 왜 그러는지 알고 싶다면, 

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섬세한 시선으로 케빈을 살펴보아야 한다. 

케빈의 행동, 케빈의 말, 눈빛을 놓쳐선 안된다. 

케빈은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였을 때부터 시종일관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약간의 흐트러짐이 비추는 순간, 영화는 끝이 난다. 


일단, 케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면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있다. 

케빈의 증오 대상, 화를 표출하는 대상, 

끝없이 방황하고 반대하는 대상이 케빈의 엄마인 에바라는 것. 

케빈은 왜 엄마에게 저렇게 화를 내며 증오하는 것일까. 

그리고 케빈은 아빠와 여동생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을 처참히 죽였는데, 

정작 왜 에바는 죽이지 않았던 것일까?

영화는 케빈이 왜 사람들을 죽였는지가 또는 왜 에바는 죽이지 않았는가, 가 아니라 

왜 에바만 살려두었는지가 포인트였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케빈에게 영향을 준 엄마를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에바는 자유로운 영혼이고 어떤 틀이나 형식에 갇혀 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여성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직업도 자유 여행가이며, 이미 그 분야에서 꽤 유명하기도 하다. 



영화의 도입. 

즉, 에바가 처음 등장할 때 에바는 온통 빨간색이 가득한 스페인 토마토축제의 중심에 있었다.  

왜 감독은 이 곳을 첫 장면으로 선택했을까? 

이 곳은 에바의 성향과 당시 상황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어지는 다음 장면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다. 

첫 장면은 과거 찬란했던(자유로웠던) 시간에 대한 회상이고 이어지는 장면은 현실이다. 

밖에서 나는 소음에 나가보니 에바의 집이 빨간색 페인트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 

과거와 대비되는 상황에 같은 색으로 꾸몄으나 극명하게 다른 상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빨간색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보통 흔하게 태양과 정열을 표현할 때 대표적인 색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상징이 되고 정열처럼 뜨거운 열정의 상징이 되기도 하며, 

적십자를 나타내는 색으로 박애를 상징한다.

피로 물든 것처럼 빨간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집이 나오고, 한참 뒤에는 에바가 누군가를 피해 숨어든 곳이 빨간색 종이로 포장된 토마토 통조림 진열대 앞이었다. 

그리고 이후, 케빈이 에바가 아끼는 지도로 꾸민 그녀의 방을 물감총으로 망쳐 놓은 직후, 

케빈의 장난감 총을 에바가 발로 짓이겨 부셔버릴 때도 빨간색 물감이 역시 피처럼 흩뿌려진다. 

그리고 마지막 케빈이 사고를 친 현장으로 에바가 달려갔을 때도

마치 피로 물들인 것처럼 사방이 빨간색 조명으로 가득했다. 


어쩌면 감독이 의도하지 않는 효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 보면서는 몰랐던 것이 두 번째 영화를 보면서 눈에 띄고 거슬리기 시작해서 알게 된 부분이었다. 

지속적으로 빨간색을 피처럼 노출시킴으로써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대단한 사건이 벌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빨간색은 동시에 에바의 욕망이고 꿈이기도 했다. 

에바와 케빈의 관계는 조금씩 파국으로 치닫고 있지만, 어쩌면 에바는 자신의 꿈(자유로움, 여행가)을 놓지 않았다. 실제로 케빈을 낳고서 케빈이 크게 자라고 나서도 서점에 대형 포스터가 걸릴 만큼 그녀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일을 해왔고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붉은색 조명이 가득 찬 케빈의 학교 앞. 

결국 에바의 아들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에바도 분명 나름대로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그녀에게는 엄마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겪게 될 일보다 

자신의 커리어나 꿈을 잃은 상실감을 더 두려워했다. 

그녀는 몰랐을테니까.

 

에바가 길거리에서 피해자 부모에게 따귀를 받고 욕을 듣던 장면

범죄가 있고 난 후, 사람들은 에바를 비난하고 질책하며 욕했다.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엄마라고 사람들은 비난했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남편과 딸을 잃은 그녀 역시 피해자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에바 또한 예상하지 못했고 원하지 않았던 결말이었다. 


에바는 남편 프랭클린을 사랑했다. 

그러나 사랑에 충실했던 것이지, 2세나 결혼이란 중대사가 그녀의 삶에 계획된 적이 없었다. 

2세인 케빈이 생기면서 에바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떠도는 삶에서 한 곳에 머무는 삶으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에바의 원치 않는 결혼과 출산. 

그 과정에서 에바는 단 한 번도 행복하게 웃으며 즐거운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만삭이 되어가면서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어색하기만 했으며, 

만삭이 되어도 다른 임산부들과 다르게 부른 배를 옷으로 감추며 불만스러워했다. 

에바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변해가는 자신의 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엄마가 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임신 내내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그녀는 케빈을 출산하고서도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을 하고 케빈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엄마의 이런 감정들을 케빈은 뱃속에서부터 고스란히 공유했을 것이다. 

아들이 불편하고 반갑지 않은 그 감정이 태아에게 전해졌고 어쩌면 케빈도 그 감정을 갖고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케빈은 알 수 없다. 

그 감정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것은 에바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식을 공유한 채 태어난 케빈은 말도 하지 못하는 갓난쟁이였을 때부터 에바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에바가 자신을 반가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케빈도 엄마가 반갑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울기 시작했고 에바는 그런 케빈을 달래 주면서도 형식적인 부분이 많았다. 

자연스럽지 않은 억지 웃음이지만 에바의 고충도 이해가 되는 장면.

아니면, 매우 지쳐 마지못해 달래고 있던 적이 많았다. 

적어도 내가 보는 에바는 그랬다. 

처음에는 단정 지을 수 없었는데, 에바가 둘째로 딸을 낳으면서 비교가 된 부분이기도 하다.

케빈이 말썽을 부리면 왜 그런지 이유를 들어주고 달래 주거나 기다려주는 것보다 쉽게 화를 냈다.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악순환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공유하고 태어난 케빈은 무의식적으로 엄마가 불편했거나 두려웠기에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에바는 처음에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고 한계에 다다르면 화를 냈다. 그녀는 너무도 서툰 엄마였다. 

문제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 때문에 케빈이 다 자라면서 에바는 케빈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케빈을 피하게 되고 그로 인해 케빈이 살인을 결심하게 된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케빈은 이렇게 다 커서도 일부러 대소변을 가리지 않고 기저귀를 차고 있다.

케빈은 나쁜 짓을 하고 항상 에바를 노려보거나 쳐다본다. 

좋아하는 여자 괴롭히는 악동처럼 그렇게 엄마의 반응을 살핀다. 

이것은 케빈이 학생들을 학살하고 나와 경찰에 연행되면서 제대로 드러난다. 

에바는 그때도 케빈을 외면했다. 

케빈이 어릴 땐 화를 냈지만, 그 이후엔 점차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에바는 케빈에게 화를 내거나 외면하기만 했고 케빈과 대화를 시도하거나 타이르지도 못했다. 

처음에 에바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였을 수 있고 

나중엔 자신의 아들임에도 케빈이 두려워서였다. 

어쨌든 케빈은 엄마가 봐주길 바라면서 끊임없이 사고를 쳤고 급기야 대형사고를 치고 엄마를 보는데도 엄마는 끝내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았다. 



"이래도 나를 안 볼래?"


경찰에 의해 제지를 당하면서 케빈은 엄마를 똑바로 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사전적인 의미로 봐달라는 것뿐만 아니라, 

대단히 삐뚤어진 방식으로 에바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다.


에바는 서툴고 부족한 엄마였지만, 문제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되었기 때문에 익숙해져야 했고, 

시간이 지나 어렵게 익숙해지긴 했지만 케빈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로선 이유를 모르니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함께 골프를 칠 때 뚱뚱한 사람에게 막말하는 에바에게 대드는 케빈.


게다가 에바의 천성이 원래부터 다정다감하거나 인성이 올곧은 사람도 아니었다.

자아가 강한 그녀가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반성하는 성향도 아니다. 

케빈은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자신의 행동에 확신이나 정당화를 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런 케빈이 에바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따랐던 때가 있다. 

어린 케빈이 먹은 것을 게워내고 아팠을 때, 에바는 여느 엄마처럼 케빈을 돌보았다.

처음으로 케빈이 미안하다고 하는 말에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말한다. 

케빈과 엄마라는 역할에 익숙해져서였을지라도 그녀에게는 이렇게 평범한 엄마의 모습도 있다. 

나 역시 유일하게 이 장면에서 에바의 진정성을 느끼기도 했다. 

이때 케빈은 처음으로 엄마라고 어리광 부리며 스스로 안기기까지 했다. 

케빈이 온순하고 여느 아이들처럼 굴면 둘 사이에는 문제가 없는데, 

케빈이 조금이라도 삐뚤어지기 시작하면 에바는 케빈을 감당하지 못하고 내버려둔다. 



Eva      : well, Haven't you ever wished you have somebody else around play with?

           * 혹시,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니?

Kevin   : no.  

Eva      : you might like it.  * 생기면 너도 좋아할 거야.

Kevin   : but, if i don't like it.   *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면? / 내가 싫어하면 어쩔 건데?

Eva      : then you get used to it.   * 그럼, 익숙해져야지. 

Kevin   : just because you're used to something, doesn't mean you like it. 

            you're used to me.

           * 익숙하다고 해서 좋아한다는 건 아니야. 엄마도 나한테 익숙하잖아.



에바가 둘째가 생기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케빈과 대화를 했을 때 나누었던 내용이다.

내가 듣고 옮겨 적은 것이라,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이것이 중요한 대화였던 것이 그토록 엄마가 되기 싫었던 에바가 둘째를 갖았다는 것과 케빈이 처음으로 자기 생각을 내비친 장면이기 때문이다. 

에바는 어쨌든 케빈을 키우면서 엄마와 가정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다시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케빈과 다르게 좋아한다. 그것은 어쨌거나 케빈을 통해 엄마라는 것에 현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나중에 딸을 키울 때는 케빈과 다르게 조금 능숙한 엄마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딸은 케빈과 다르게 천사 같아서 더 수월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딸에게는 항상 웃어주는 엄마였고 케빈에게는 항상 화만 내고 무뚝뚝한 엄마가 되었다. 

만약, 딸과 케빈이 순서가 바뀌어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영화는 '케빈에 대하여'가 아니라, '실리아에 대하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대화에서 볼 수 있듯이, 

케빈은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끼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태어나 무의식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라면서 보게 되는 엄마는 이미 케빈에게 지친 엄마, 또는 화가 나 있는 엄마뿐이었다. 

게다가 태어난 동생에게는 자신과 전혀 다르게 대하는 걸 보고 확신을 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자신에게 익숙해진 것이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케빈. 

그리고 에바는 자신에게만 표독스러운 아들에게 익숙해져 버렸다. 


영화의 엔딩은 에바가 케빈을 면회하고 나오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케빈이 학교에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수감된 후, 2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그동안 에바는 항상 케빈을 면회했다. 

둘이 대화도 없이 마주 앉아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에바는 케빈의 면회를 거르지 않는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꽤 의무적이라고 느꼈는데, 그건 에바의 성격을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왜냐면 마지막 면회 씬에서 에바가 케빈에게 묻는다. 


"이제 곧 성인 교도소로 이감되겠네. 무섭니?"


시퍼런 날이 서있던 케빈의 눈빛이 어느 순간 영화의 엔딩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변해있었다. 

그의 눈빛은 분명 변해있었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케빈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런 변화에 에바도 2년 만에 용기 내어 케빈에게 연이어 물었다.


"이제는 말해 줄 수 있겠지. 도대체 왜 그랬니?"


케빈의 대답이 나도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불안해 보이는 케빈이 어렵게 꺼낸 말은 다소 허무했다. 


"처음엔 내가 왜 그랬는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이 말 뒤에 케빈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 망설였다. 

아쉽게도 면회시간이 끝나 헤어져야 하는데, 

케빈은 일어나서도 이전처럼 냉정하게 돌아서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는 것처럼 

자신이 망설이는 이유를 몰라 어떤 말도 못 하는 눈치였다. 

그런 케빈을 에바가 다가와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케빈은 저항 없이 그대로 에바에게 몸을 맡긴다. 

에바가 2년 동안 케빈의 대답을 기다렸던 것처럼, 

자신에게 저항하는 케빈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늘 기다려 왔던 것처럼.



면회가 끝나고 에바가 나오는 길, 

에바는 어두운 교도소 안에서 밝은 빛이 쏟아지는 문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리고 그때 흐르는 배경 음악. 

그것이 케빈이 왜 그랬는지에 대한 관객을 위한 대답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사 내용이 대략 그랬다. 


"이제 와 엄마를 생각해보면 참 무던히도 나를 응원해 주셨지.

나도 알 수 없는 마음이 빗나갈 때, 내게 말씀하셨지. 아들아, 받아들이렴."


에바는 의무적으로 케빈을 면회한 것이 아니라, 그녀만의 표현 방식이었던 것이다. 

케빈이 사고를 치던 그 날, 

의무적인 듯 이마에 손을 얹고 기계적으로 괜찮냐고 물었던 것도 그녀의 성격이고 방식이었다.


남편과 딸,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니까, 그녀는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욕하고 손찌검하는 것도 그녀는 감내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그것이 좋지 않은 방법이었을지 몰라도 케빈을 외면했던 것도 그녀의 방식이었다. 

이제야 후회해도 지나간 일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그녀가 그 언젠가 케빈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익숙해진 에바를 보면서 케빈은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자신도 몰랐던 자신이 삐뚤어졌던 그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