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와 실화가 섞인 러브 스토리입니다.
0. 참고 및 이야기 배경, 카미노란?
산티아고 가는 길 (http://varamizoa.tistory.com/76)
1. 프롤로그 - 란의 비 (http://varamizoa.tistory.com/74)
2. 프롤로그 - 파비안의 비 (http://varamizoa.tistory.com/73)
3. 란, 파비안의 첫인상 (http://varamizoa.tistory.com/80)
4. 파비안, 란의 첫인상(http://varamizoa.tistory.com/85)
5. 란, 뜻밖의 동행 (http://varamizoa.tistory.com/91)
6. 파비안, 뻔한 사람들의 흔한 이야기 (http://varamizoa.tistory.com/97)
7. 란, 하나의 우연 조각 (http://varamizoa.tistory.com/102)
8. 파비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오랜만에 깊은 숙면을 취했다. 수십여 날 맨땅에 몸을 뉘었던 내게 꿀처럼 달콤한 밤이었다. 깊은 잠에 들었어도 나는 중간중간 곧잘 잠에서 깼다. 열세 살부터 이미 독립된 집에서 살아왔던 내가 누군가와 한 침대를 나눠 쓰는 일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잠깐씩 잠에 깨어 뒤척일 때마다 그녀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침대 한쪽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자고 있던 그녀는 곧 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혹시나 한 침대에 있는 것이 불편하진 않을까 나도 나름 신경 쓰며 침대 끝에 매달려 잠을 청했다. 실제로 뒤척이다 몇 번을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곤히 자고 있거나 간간이 악몽이라도 꾸는 듯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든 동안에는 단잠을 잘 수 있었고 묵은 피곤함도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며칠 전, 간밤에 알베르게에서 누군가의 비명소리를 들었어. 혹시 너도 들었어?”
간밤에 내린 비로 하늘은 청명했고 우리의 발걸음도 매우 가벼웠다. 혹시나 간밤에 그녀가 잠을 설치진 않았는지를 묻고 며칠 전 들었던 비명소리에 대해서도 물었다. 내 질문에 그녀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비치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실, 그거 나야. 악몽을 꾸었거든.”
그녀는 그날 또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종교를 믿지 않는 것처럼 악령이나 엑소시즘 따위를 믿지 않는 내게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사실 조금 믿기지 않았다. 악령이나 악몽도 심약한 인간에게서 비롯된 허상이라고 여겼던 내게 그녀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런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모든 것은 그녀가 그 집으로 이사하면서 시작되었다. 미취학 시절인 아주 어릴 때부터 살던 집이 낡아 빌라단지 전체가 재건축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체 퇴거일 까지도 거주지를 확정 짓지 못했던 란이네 식구들은 친척과 친구들 집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원래 살던 동네에서 한 블록 아래에 떨어진 또 다른 빌라 한 채를 아주 헐값에 구매하게 되었다. 몇 개월 만에 식구들이 모두 모여 다시 살게 되었는데, 그 집에 사는 5년 남짓한 시간 동안 행복했던 기억이 전혀 없다고 했었다. 오래전부터 란의 동생이 키우던 강아지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시작으로 두 번 더 강아지를 데려오지만 모두 집을 뛰쳐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함께 살던 란의 조모가 암으로 긴 시간 투병 끝에 세상을 뜨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외삼촌 한 분은 실종되고 막내 이모와 다른 외삼촌 한 분도 연달아 돌아가시게 된다. 같은 시기에 란의 어머니는 알코올에 점점 의존하여 살게 되고 생전 집과 일터밖에 모르던 아버지도 한눈을 팔게 되면서 란의 가족은 또다시 흩어지게 되었다. 그즈음 그녀도 악마라 칭했던 그 사람과 한차례 홍역을 치르고 허우적대던 시기였고 그녀의 악몽은 그 집으로 옮긴 첫날부터 시작되었다.
평소에 란은 그녀의 동생이 그녀와 다투고 그녀가 잠든 동안 복수심에 꼬집거나 가벼운 구타를 해도 세상모르고 자던 사람이었다. 자다가 책상에 코를 찧어 코피를 흥건히 흘려도 모르고 자던 그녀가 그곳에서 겪은 악몽들은 수도 없었다. 구렁이가 스르르 몸을 타고 조여 오는가 하면, 알 수 없는 소리가 그녀를 둘러싸고 그녀에 대해 조잘거리기 일쑤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던 그녀가 정점을 찍었던 일이 있었다. 거실에서 잠들어 있던 그녀가 현관 밖 100미터까지 투시되어 보게 되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물체가 그대로 서서 그녀의 집을 노려보더니 빠른 속도로 현관을 거쳐 그녀의 앞에 섰다. 이윽고 나타난 그 물체는 형형색색의 넝마 같은 옷을 대충 걸치고는 괴랄한 춤을 추며 웃고 있었다. 귀까지 찢어진 입으로 웃던 그 모습이 너무도 괴이하여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킨 그녀가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당황하여 고개를 드니, 멀리서 춤을 추던 괴이한 여자가 그녀에게 다가서는 것이었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그녀는 제 몸에 누웠고 잠에서 깼다. 그녀는 그것이 아직도 현실인지 꿈인지 모호하다고 하였다. 나는 그것이 꿈이라고 단정 지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그 집에서 이사 나오기 전까지 그녀는 매일 같이 이런 악몽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사를 나오고 얼마 못가 또 다른 외삼촌이 간암으로 돌아가시게 되고 나서 어떤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되는데, 그것 또한 우연이라고 하기에 조금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녀의 가족이 그 집을 이사 오기 전에 그 집에서 누군가 급사를 하게 되어 그 집이 싼 매물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가끔씩 육감이 예민한 사람들이 그 집을 방문하면 싸늘한 기운을 느끼거나 불쾌한 기분에 오래 있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했다.
“여기 너무 추워요. 추워요.”
뿐만 아니라, 가끔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를 거지나 노숙자 집에 들어와서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다가 내쫓겼다. 그녀가 이런 이야기를 내게 굳이 꾸며내서 늘어놓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쉽게 믿기지 않는 그런 이야기였다. 사실 여부를 떠나, 몇 년 동안 가까운 친척과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것만으로도 그때 그녀의 시간은 충분히 위로받아 마땅했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의 악몽이 그 집을 벗어나고 현저히 줄어들기는 했지만, 가끔씩 여전히 그 악몽과 싸워야 했던 그녀가 어쩐지 측은하게 느껴졌다. 이미 몇 해가 지난 이야기인데도 당장 어젯밤만 해도 그녀는 악몽을 꾼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면 그녀가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을까. 도와주고 싶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는 나랑 왜 함께 걸어?”
함께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어서 그녀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이유가 없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걷게 된 것인데 그녀가 이런 대답을 듣기 위해 질문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너는 내가 좋긴 해?”
왜 함께 걷느냐고 묻고 며칠 뒤, 그녀는 또 이런 질문을 했다. 그녀의 질문들은 하나같이 내게 쉽지 않은 질문들이었다. 언젠가 그녀가 이 길이 끝나면 무엇을 할 것이냐 물었던 질문과 같다. 하고 싶은 것과 계획이 없는 나는 그날그날, 그때에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낸다. 그녀와 함께 걷는 것은 함께 걷는 동안 나누는 대화가 좋았고 그녀가 편했기 때문이었다. 매 순간마다 생각하거나 계획하지 않고 그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머물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자기를 좋아하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좋다.’라는 의미가 단순히 좋고 싫음을 묻는 것인지, 이성적인 호감을 묻는 것인지 모호했기 때문이다. 질문이 어느 쪽이었든지, 역시 내가 대답하기는 어려운 질문이다. 그녀를 내가 좋아한다고 한들, 나는 내가 하는 그 말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과 순간을 즐기고 싶은 것뿐인데, 감정을 내뱉어서 내 말에 책임을 지고 그 말에 묶이게 되는 것이 싫었다. 내 인생 하나도 방향을 잡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데 이런 삶에 지나가는 감정을 끼워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분명 그녀가 좋다. 그래서 함께 걷고 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은’ 좋다는 이 말이 왜인지 가볍게만 느껴졌다. 생각 속에 있는 한 마디도 이렇게 가볍게 느껴지는데, 그 말을 내뱉고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가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오해가 되는 말은 뱉지 말고 차라리 삼키자고만 생각했다.
바람은 서서히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볕도 더는 따갑지 않고 따스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마을 사이사이에 졸졸 흐르는 물줄기도 가늘어졌고 가끔씩 보이는 분수대의 물줄기도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춤추며 흩뿌리기 시작했다.
리바데세야(Ribadesella)에서 먹을 것들을 사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알 수 없는 복통을 호소하는 그녀 때문에 걷다 서다를 반복하다 결국 벤치 옆에 누워 2시간을 쉬었다. 그녀는 그날 종일 매우 힘겹게 걸었다. 그날은 그녀의 앞이나 뒤에 서지 않고 옆에서 함께 걸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가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걷다 적당한 곳을 찾아 비박을 해도 상관없지만, 꼭 숙소에서 자야 하는 것은 그녀였다. 그녀의 복통은 다행히 산을 오를 때 조금 완화되는 것 같았고 어쩌다 보니 산 위의 작은 마을 산 에스떼반(San Esteban)까지 올랐다. 길 위의 숙소가 다 그렇듯 이곳에도 집 몇 채가 전부인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그곳에 힘겹게 오늘을 버텨준 그녀에게 작은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뒤에 있다던 한국사람 2명을 만나게 된 것이다. 란이를 마주치면 지나던 사람들이 한국사람 두 명이 뒤에 오는데, 산탄데르에 그녀가 써 놓은 방명록을 보고 그때부터 만나보고 싶어 했다며 간간이 소식을 전해 주곤 했었다.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을 때 이안은 그녀보다도 더 기뻐하며 뛰어와 그녀에게 소식을 전해주었다.
“헤이! 란! 드디어 너도 모국어를 할 수가 있게 됐어. 얼른 나와 봐!”
“이봐! 이안. 내 이름인 '헤이란'이 아니라 '혜란'이라고.”
“네 풀네임을 부른 게 아니야. 그것보다 너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왔어.”
자국인을 만난 그녀도 기뻤는지 한동안 그들과 섞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한국을 떠나오고 한 달이나 걸려 처음으로 모국어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녀에게 허락된 기쁨도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은 이틀 뒤면 북쪽 길로 떠난다고 했다. 북쪽 길은 3분의 2 지점쯤에, 북쪽 길로 머무는 길과, 해안 길을 벗어나 산으로 들어서는 프리미티보(Primitivo) 길로 다시 나뉜다. 그녀는 떠나오면서 이미 프리미티보로 길을 정해두고 있었다. 걷는 동안 마주친 모든 사람들이 물었지만 나는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해안을 끼고 걷는 북쪽 길도 매력적이었지만, 카미노에서 매우 아름다운 길로 정평이 나있는 프리미티보를 경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일주일 이상 보지 못한 루카스도 여전히 고민 중일 것이다. 이안은 북쪽 길로 걸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처럼 비박을 줄이고 숙소에 머물며 이렇게 비슷한 사람과 연이어 함께 어울린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카미노라는 길 위에서 만남과 이별은 매일 매일 반복되고 익숙해져야 하는 흔한 일이다.
“조금 후에 보자.”
“이따 숙소에서 보자.”
아무도 십분 뒤의 일을 약속할 수 없는 것이 카미노다. 아침에 출발 전 혹은 잠들기 전 내일 어느 마을로 갈지 서로 정보를 나누며 다음을 기약하지만, 그중에 반은 그날 그 시간이 마지막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며칠을 보지 못하다가 만나기도 하고 한 번 보고 내내 보지 못하다가 산티아고 성당에서 마주치기도 한다. 길고 지루한 인생이 이 짧은 길에 함축되어 있듯이 감히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어느 길로 갈 것인지 그녀도 내게 이미 여러 번 물었다. 이제 막 세상에 한 발자국씩 내딛기 시작하여 모든 것이 신기한 어린아이의 쉼 없는 질문처럼 그녀의 질문들은 내게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결정하고 대답해야 할 때이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내일이면 그 갈림길에 서고 말테니까.
세브라유(Sebrayu)에서의 밤을 보내고 또다시 아스투리아스의 산 속에서 아침을 맞았다. 그녀와 이안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인연이 다시 닿으면 산티아고에서 만나자 했지만,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거라는 것쯤은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안과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어떤 길로 갈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구태여 내게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내가 프리미티보로 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프리미티보에서의 시간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짙은 안개가 더없이 멋있는 장관을 만들었고 그 안개 속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복잡했던 머리도 맑아지는 느낌이다. 폭신한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인지, 짙은 안개를 헤치며 걷고 있는지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기분만큼은 황홀했다.
“안개 속을 걷다 보면 기분이 신비로워.
만화나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이 꼭 내 인생 같아서 끝도 없이 우울해지기도 해.”
그녀는 언제나 새로운 화두를 들고 나온다. 서두르는 법 없이 늘 느긋하고 여유로운 나와는 너무도 다른 그녀를 만난 것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항상 미래에 대한 고민을 했으며 그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했다. 그녀에게 나는 인생을 좀 더 천천히 누리면서 살라고 잔소리했고 그녀는 내게 하고 싶은 것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받아쳤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그녀의 끊임없는 질문들은 잠들어 있는 뇌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하여 어느 순간 내 무의식들은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갈림길 앞에서 선 내 발은 그녀와 함께 프리미티보로 접어들었다. 조금 늦었지만 내 무의식이 처음으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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